천 개의 샴푸가 가르쳐준 것들
“사업은 돈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내가 지금은 창업을 하여 어떤 제품을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바꾸어 놓았을까?
난 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른이 되면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직장에 나가 일하는것이 가족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책임이라 여기며 자랐다. 도시에서 살면서 내 공간 하나 빌릴 여유가 없으면 장사나 사업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분이었지만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한번 들어간 직장은 오래도록 다니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 나에게 ‘사업’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일까. 나에게 ‘가장은 으레 직장인이어야 한다’는 강한 선입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혼 후, 이 선입관은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남편과 나는 자주 부딪혔다. 우리에게는 집 한 채 마련할 자금조차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사업이냐’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남편도 사업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아이 셋을 데리고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작은 군 단위 지역으로 이주했다. 아이들은 그곳의 작은 학교에 입학했고,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농촌으로 이주한 후 주거비 부담은 줄었지만, 당장 생활비를 위해 맞벌이는 필수였다. 다행히 군 지역에서 나오는 계약직 일자리는 아이들을 돌보며 다니기에 적당한 조건이었다. 그런 중에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체험마을 사무장 자리를 소개받은 것이다. 체험마을은 마을의 자원을 활용해 마을소득을 늘리고 농촌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국가 사업이다. 사무장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을의 다양한 자원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발전 계획을 세워야 했다.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등 어떤 사업이 필요한지 마을 주민분들과 함께 고민하여 큰 그림을 그리는 중요한 임무였다. 공공기관에서 단순 업무나 보조 역할만 해오던 내가 마을 소득 창출을 고민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일단 주어진 일에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내가 근무했던 마을에는 특별한 자원이 있었다. 맑은 물에서만 자란다는 석창포였다. 마을에서는 이 석창포를 활용하여 천연 샴푸를 만들어 판매하고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단체 손님들과 개인 고객들이 찾아와 직접 샴푸 만들기를 체험했다. 축제 기간에는 석창포 샴푸를 대량으로 제작해 판매하기도 하고, 관공서에 납품하기 위해 밤늦도록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사업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특히 남아있는 제품을 판매할 때 간절함이 우러나와 손님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는 것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천 개 가까운 제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모두 판매하는 과정이 힘들면서도 기뻤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들인 수익이 마을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마을 잔치 때 어르신들의 기쁨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보람이었다.
마을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사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업이란 거창한 자본이나 완벽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작은 자원 하나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가장 큰 깨달음은 ‘진정한 만족감’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단순히 월급을 받는 것과 내가 직접 만든 제품이 팔리는 것 사이에는 질적으로 다른 성취감이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든 천 개의 제품이 하나씩 소비자에게 전해지고, 그 수익이 마을 공동체의 기쁨이 될 때 느꼈던 보람은 그 어떤 직장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과거의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부끄러워졌다. “돈이 없으면 사업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던 나 자신에게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업의 시작은 돈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열정이다”라고 말이다. 남편의 사업 의지를 막았던 것도 결국 내 안의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안정을 추구한다는 명분 하에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남편과 작은 것부터라도 시도해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체험마을에서 일하며 깨달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진정한 기업가정신은 단순히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제품과 서비스가 누군가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지역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창포 샴푸 하나하나에는 마을의 이야기가 담겨있었고,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가치와 철학을 함께 사가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업’이 무엇인지, ‘사회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중소기업 지원 창업 교육을 알아보고,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판매 전략 교육을 눈여겨보며 배움의 시간을 갖고 있다. 사업 관련 책들도 꾸준히 읽으며 이론적 토대를 쌓아가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큰 사업 자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의 내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사업을 해서는 안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다르다. 온라인 쇼핑몰과 SNS를 통해 작은 자본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수익 창출이 쉬워진 것만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구매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요즘 소비자들은 단순히 좋은 제품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자신에게, 사회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고려한다. 그 수익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도 관심을 갖는다. 이는 기업가에게 더 큰 책임과 동시에 더 큰 기회를 의미한다. 소비자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제공하며, 나아가 환경 문제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기업가야말로 지속 가능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체험마을에서 배운 방식을 내 사업에도 적용하고 싶다. 마을의 다양한 자원을 조사하고 연계해서 마을 공동체를 위한 수익을 만들어냈듯이, 나 역시 내가 가진 강점을 파악하고 이를 사회적 가치와 연결하는 사업을 하고 싶다. 내가 자신있는 분야와 부족한 분야를 솔직하게 나누어보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연계하고 활용해서 의미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수익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철학을 갖는 것이다. 단순한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가가 되고 싶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진정한 기업가정신은 큰 자본이나 완벽한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사회적 책임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마을에서 배운 이 소중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만의 작지만 의미있는 사업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내가 만난 인생 최고의 기업가
업무관련 열정 가득 찬 대표님을 만난 건 저 에겐 행운이었습니다. 게으르고 긴장감 없이 살아온 저였습니다. 면접을 본 후 한 달을 허송세월 하였습니다. 출근하라는 연락이 오지 않더라구요. 물론 대표님 회사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회사들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그때당시 이상하게 취직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밥만을 축내기엔 엄마와 둘만 사는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어디 나가서 밥값을 해야 할 때였습니다. 면접본지 딱 한 달 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부터 출근 하라구요.
저의 업무는 회사에서 납품에 필요한 모든 자료들을 전산화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취업하기 위해 컴퓨터를 배워 두었고, 저 스스로는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표님은 국내에 공급되는 수입산 공구류를 국산화작업에 도전하고 계셨습니다.
현장에 공급되는 수입산 공구류들은 구매 시 단가가 높고, 납기지연, 운송되는 과정에서 파손되는 제품이 발생하여도 적절하게 조치 받지 못하고 불량품 관련 부당함을 구매자 쪽이 감당해야 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수입품이 아닌 국산품 사용화를 만들기 위해 대표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대표님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곱시 출근하셔서, 외근, 출장의 업무가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설계/검토/연구 업무를 보십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제품설계만 하시다 퇴근하는 날도 있습니다. 저의 하루일과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출근 후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나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그날의 업무를 봅니다. 납품처 수주현황을 확인하고 매출내역을 전산입력하고 제품별 재고관리가 가능하게 프로그램 작업을 합니다. 혹여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으면 고객처 별 연락처 등을 데이터 베이스화 하여 전산작업을 해둡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우연치 않게 대표님 병증을 알게 됩니다. 한 달에 한번 서울병원을 다녀오셔야 하고 하루 두 번 반드시 챙겨야 하는 약이 있는데 일을 하다 보면, 제품개발에 관한 설계를 하다보면 약을 먹어야 하는 일을 새까맣게 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휴대폰이 대중화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또한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대표님 청력이 매일같이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껏 수입에 의존하던 장비들을 국산화하여 국산제품을 현장에 공급한다고 했을 때 시원하게 박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종전처럼 수입품을 내놓으라 했고, 국산품을 어떻게 믿고 쓰느냐 현장의 목소리는 인정사정 없었습니다. 당연히 회사의 사정은 어려워졌습니다. 직원들의 급여가 미지급상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3개월 정도 엄마에게 급여를 가져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셨고, 저는 일 때문이 아니라 대표님 암 치료 받는 동안 하루 두 번 약 챙겨드리기 위해서라도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표님은 꿋꿋하게 제품의 국산화 업무에 매진 하셨습니다. 일가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딱 한번 사채마저 끌어다 현장 직원들 급여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또다시 제품개발에 몰두하셨습니다. 대표님의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항암주사를 맞으면 말이야.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
지금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싶지. 그러나 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어. 주사를 맞고 참고 견뎌야지.“
대표님 그 말씀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1985년 설립된 회사는 2025년 현재 천여가지가 넘는 제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품별로 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관련 지식재산권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대표님 혼자 이뤄내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릇 기업가란 믿음과 집념이 있어야 한다구요. 열정으로 똘똘 뭉친 대표님은 암으로 인해 사망선고를 받았음에도 되게 하겠다는 도전정신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이루어 내셨구요. 암 완치판정을 받았고, 공구류 관련 국산화를 이루어 산업경제에 이바지 하셨습니다. 이제는 국산이라 믿을만하다는 총평을 받습니다.
제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기업가이십니다. 기업설립 후 40년 오로지 한 길로만 걸어오셨습니다. 이제는 연세도 많으셔서 일선에서도 물러나셨습니다. 오너2세가 경영합니다. 그래도 출/퇴근은 하시기 때문에 아직은 직원들의 질문을 받고 옳고 그름을 판결해 주십니다. 바른 소리 옳은 소리만 경청해 주시고 건강하셨으면 바랍니다.
제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기업가이십니다.
전지적 사장 시점
2020년, 서릿바람이 매섭게 불던 12월.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퇴사를 했다. 연봉이 아쉬웠던 것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연봉 협상과 진급을 이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선택한 이유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부모님은 의왕시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계셨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조치로 문을 열 수 없는 날이 이어지면서, 가게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 시절, 전전긍긍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부모님께서 조심스레 내 방에 들어오셨다.
“혹시 네가 한번 운영해보면 어떻겠니?”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외부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젊은 감각이 부족하다 보니 손님층이 한정적이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변 가게들의 텃세와 무례한 손님들로 인한 상처가 쌓이며, 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여유를 잃어가고 계셨다.
새벽까지 이어진 긴 대화 끝에, 나는 결국 부모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할게요. 대신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든 터치하지 마세요.”
그렇게 나는 직장에서의 ‘대리’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사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메뉴 매출 분석이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의 판매 데이터를 모아, 어떤 메뉴가 어느 시간대에 잘 팔리고, 계절에 따라 손님들이 어떤 음료를 찾는지 꼼꼼히 살폈다. 마치 작은 도서관을 채우듯, 나는 밤마다 데이터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결국,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메뉴판에 ‘수제’ 라는 단어가 붙은 음료와 디저트가, 다른 메뉴보다 언제나 더 높은 매출을 기록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주변 카페와 달리 가진 차별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수제’였다. 손님들에게 손수 만든 재료로 진심을 전하고 싶다는 부모님의 철학 아래, 카페의 모든 메뉴 재료는 가게 안에서 직접 제조되고 있었다.
물론 손님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방식이었지만, 경영상으로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매출을 늘리려면 회전율을 높여 많은 손님을 받아야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매장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결과 손수 만든 재료들은 그대로 재고가 되어버렸고, 곧바로 손해로 이어졌다.
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며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이디어스’라는 이커머스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는 손재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수제 약과, 수제 스마트폰 케이스, 수제 컵까지.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다양한 작품들을 보며, 처음에는 높은 퀄리티의 벽이 너무 높아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박함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그 마음은 벽조차 부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늦은 밤까지 플랫폼의 구조와 판매 흐름을 파고들며 분석했다. 특히 우리가 도전해야 할 ‘수제청’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살폈다. 작은 희망을 붙잡고 연구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수제청은 온라인 스토어 진입 장벽이 낮아 동일한 레시피의 제품이 넘쳐났고, 이미 플랫폼 내에서 상위 노출을 차지한 브랜드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선택지는 제한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기로 했다. 온라인 판매를 위한 모든 법적 절차와 제품 기획, 사진 촬영, 상세 페이지 디자인, 택배 계약까지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호기롭게 첫 제품을 등록하던 날의 설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상품을 등록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건의 주문도 없었다. 매출은 0원이었다. 재고는 쌓여갔고, 유통기한은 줄어들었다.
그때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플랫폼 화면을 바라보며 주문을 기다리거나, SNS에 제품을 홍보하는 것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매일 매일 사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처음 아이디어스를 알게 되었을 때의 마음으로, 수제청을 판매하는 약 80여 개 브랜드의 모든 요소 가격, 용량, 배송비, 옵션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다시 분석했다. 정답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 속 어딘가에 답이 있으리라 믿었다.
길고 긴 노력 끝에, 결국 작은 돌파구를 발견했다.
광고 없이도 상위 노출을 차지한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바로 ‘선물’이었다.
그들은 수제청을 단순히 집에서 먹는 음료가 아니라, 예쁜 패키지에 담아 선물세트로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지인 디자이너에게 패키지 디자인을 의뢰했다. 빠른 시일 내에 ‘수제청 선물세트’를 준비할 수 있었고, 때마침 다가온 명절인 추석과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출시 직후, 월 매출은 단숨에 492만 원을 돌파했다. 매출 0원에서 시작해 2년 만에 2천만원 이상의 연 평균 매출을 기록했고, 결국 아이디어스에서 주최하는‘핸드메이드 어워즈’ 행사에 초청받아 ‘은손 작가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꾸준히 카페와 아이디어스 스토어를 운영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때의 희열과 치열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동네 골목의 작은 공방에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실패와 시도가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과연 그때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대단한 비밀은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구했을 뿐이다.
포기하지 않고, 연구하고, 시도하는것 . 그게 전부였다.
모든 걸 글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본디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누군가 기업가정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사장이었던 내가 전해줄 수 있는 답은 세 가지다.
포기하지 않는 것, 연구하는 것,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그 길 위에 서 있는 당신이야말로, 이미 기업가다.
장애인이 아니라 장터애(愛)인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5시가 되면 어머니의 하루가 시작된다. 5시 기상하자마자 출근 준비를 하신다.
우리 부모님은 장터에서 장사를 하신다. 벌써 횟수로 30년을 넘겼으니 이미 인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가게가 되었다.
하지만 이웃 사람들은 이젠 그만 장사 접고 여행도 다니시라고 권유를 한다. 최근에도 옆집 아저씨가 어머니께“요즘 불경기라 장사도 어렵고 적자인데 이젠 그만큼 일하셨으면 놀러 다니시고 경치 좋은데 구경도 하세요”라고 권유하자 어머니는 “아직 팔팔한데 더 일해야지요. 놀러 다닐 시간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씀하신다.
이웃이 어머니께 쉬시라는 말씀을 하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머니께서 10년 전에 중풍으로 장애3급 판정을 받은 중증장애인이시기 때문이다.
10년 전 겨울 어머니께서 가게물건을 정리하시다 갑자기 쓰러지셨다. 물건 배달을 다녀온 후 가게 안에 쓰러져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아버지가 급히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셨는데 중풍이 심해서 신체의 좌측이 마비되었다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아버지께 처음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활발하던 어머니께서 말씀이 어눌해지고 거동조차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니 처음 든 생각은“이게 전부다 그 망할 놈의 가게 때문이다”라는 원망이었다. 장터에서 한겨울의 찬바람을 맞아가면서 여름에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제대로 된 냉난방시설조차 없는 8평의 가게를 내 몸처럼 꾸려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면서 그놈의 가게 때문에 어머니가 이지경이 되었다는 생각에 아버지께 이젠 가게 접자고 권했다.
시골 장터의 하루는 고되다. 어머니는 새벽5시에 일어나서 나와 내 동생 도시락을 준비하시고 아침8시면 가게를 열어 아버지는 배달을 다니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다 밤9 시가 돼서야 가게를 닫는다. 8평 가게 안에서 하루 종일 청소하고 물건 나르고 물건팔고 하는 일을 30년 넘게 반복하시니 몸이 못 배겨 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무려 3달간 병원에 입원 했지만 좌측 팔다리의 마비는 치료하기 어려웠다. 입원한 3달 동안 어머니는 내내 가게 걱정만 하셨다. 누워서도“장사해야하는데.”라는 말씀만 하시는데 답답했다. 어머니께 가게 좀 그만두라고 수백번 말씀을 드렸지만 허사였다. 시골 장터에서 고작 몇천원짜리 생활용품, 잡화물품들 파는 가게가 대체 무엇이기에? 어머니는 마치 천직인 것처럼 저리도 손을 놓지 못할까? 라는 원망을 했다.
어머니의 고집에 아니나 다를까 퇴원한 다음날 어머니는 가게를 여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는 “내가 가게는 운영할거니 제발 가게에 신경 좀 그만 써, 몸조리가 우선이지 왜 고생을 사서해?”라고 화도 내보았지만 허사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게를 다시 여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이 가게는 내 인생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이만한 가게를 꾸릴 동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스러웠다. 그래서 이놈의 장사 그만 때려 쳐야지! 라는 생각도 수도 없이 해봤지만 그래도 가게가 조금씩 커나가고 손님들이 우리가게 물건 값싸고 좋다고 자주 찾아주고 이웃 상인들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면 힘들어도 힘들 줄 모르게 해준 게 이 가게다. 그런데 내가 이일을 어떻게 여기서 포기하겠니? 이일을 운명이라 여기고 계속 일하고 싶어.”라고 말씀하시는데 더 이상 설득할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가게는 단순한 장사를 넘어 삶의 의미가 되었다. 어머니에게 가게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일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존재다. 8평짜리 잡화점이 어머니께는 세상 어는 대기업 부럽지 않은 자부심이자 긍지였다는 것을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 어머니의 장사에 대한 철학과 의지, 애정을 통해 기업가정신을 배웠다.
이미 칠순을 넘긴 어머니는 오늘도 몸은 불편한 몸이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장사를 하신다.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와 함께 일하신다.
나도 지금은 직장에 다니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내일을 어머니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 본적이 있던가?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장애3급의 불편한 몸으로 일을 계속한다는 건 상상조차 어렵다. 하물며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즐기기까지 하신다.
옛말에“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처럼 어머니는 이미 장사를 즐기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몇 푼 되지 않는 물건을 팔아도 정성을 다하고 손님들의 좋은 물건 싸게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최고의 훈장처럼 여기는 어머니는 진정 자신의 일을 사랑하신다.
사람들은 중증 장애가 있다면 일을 포기해야 하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직업의 귀천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직업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 장터에서 일을 할 때 가장 활기차고 밝은 어머니께 장애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장애가 있어서 일을 못한다? 라는 말은 어머니께 아무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몸이 불편하면 남들이 한발 움직일 때 두발 움직이면 되지 라고 낙천적으로 말씀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인생을 배우고 나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어머니께서 그리도 사랑하는 일을 앞으로도 오래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할수 있다! 장애를 넘어 기업가 처럼 살아가기
저는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오른손과 오른발, 그리고 말하는 데 불편함이 있는 저는 어린 시절 낮은 자존감과 소심한 성격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나는 못할 거야.” “실패하면 어쩌지…” 머릿속에는 늘 걱정이 가득했고, 웃고울기만 하던 제가 기억납니다. 어릴 적의 저는 도전이라는 단어조차 버거웠던 아이였습니다. 대회에 나가거나 발표하는 시간은 늘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고 남들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저에겐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조금씩 변화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학교에다니며 저는 하나둘씩 다양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미술대회, 컴퓨터대회, 직업경진대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장애인음악콩쿠르 등 정말 많은 무대에 도전했습니다. 처음엔 늘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나는 못해요.”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주저하던 저였지만, 선생님들의 응원과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을 품고 연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불안했던 마음은 차분해졌고 대회를 끝마친 제 모습은 놀랍게도 ‘성장한 나’ 였습니다. 처음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발표 시간이 힘들었지만 연습을 반복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도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깨달음은 저를 ‘도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구보다 더디고 불편했지만, 저는 끊임없이 배움에 도전했습니다.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한자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죠. 열정을 갖고 몰입해 본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저를 더 큰 배움으로 이끌었습니다. 한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며 저는 점점 더 ‘도전하는 나’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단순히 스펙 쌓기가 아니었습니다. 나도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자기 신뢰, 즉 ‘내 삶을 내가 주도해가는 힘’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기업가정신의 시작이었습니다. 19살이 되던 해, 저는 시설에서 퇴소해야 했고 바로 자립과 취업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꽃동네학교의 학교기업에 취업하게 되었고 제가 처음 맡은 일은 계량과 반죽이었습니다.‘내가 손도, 다리도 불편한데… 이걸 잘할 수 있을까?’ 처음엔 두렵고떨렸습니다. 실수도 많았고, 반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재료를 버리는 날도 많았죠. 그때마다 속상하고 혼나기도 했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점점 능숙해졌고 이제는 배합표를 보고반죽도 능숙히 해낼 수 있는 작업자가 되었습니다. 기업가정신은 어떤거창한 아이디어나 사업을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으로 배우고,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시 도전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삶을 책임지고 변화시켜 나가는 마음가짐입니다. 그 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실패한 날은 좌절하지 않고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배움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제약을 안고 살았지만 그 제약은 결국 저를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제약 속에서 저는 스스로 길을 찾아 나아가는 법과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저만의 기업가정신이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저는 계속해서 도전하고 배우며 내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 그대로 앞으로도계속 도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믿습니다. 도전은 나를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 이기 때문입니다. 장애가 저를 가로막지 못했던 것처럼 실패도 더 이상 저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작은 용기, 반복된 연습,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든 지금의 저는 앞으로도 도전하는 삶,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삶,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업가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아이와 함께 자란 기업가정신
금융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매일 수백 페이지의 경제 지표와 투자 보고서를 분석했다. GDP 성장률, 물가상승률, 금리 변동… 이 모든 숫자들은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었지만, 정작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멀고 어려운 용어였다. “이런 중요한 내용을 사람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늘 마음속에 자리했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그 막연한 고민은 절실한 문제의식으로 바뀌었다. “엄마, 돈은 어디서 나와?”, “왜 장난감이 비싸?”라는 아이의 질문 앞에서 나조차 말문이 막혔다. 주변을 보니 “경제교육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넘쳐났다. 시중의 경제 도서들은 대부분 개념 설명에 치우쳐 있어 아이들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확신했다.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할 문제다.”
육아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그동안 품고 있던 문제의식을 현실로 풀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기업가정신이 거창한 창업 아이템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작은 불편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기업가정신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기획한 책의 핵심은 ‘놀이’였다. 아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배우는 방식이 바로 놀이였기 때문이다. 장난감 가게를 열어 판매자와 손님이 되어 보고, 직접 만든 카드로 물건을 사고팔며 시장을 체험했다. 용돈을 기록하며 선택의 가치를 배우고, 쓰지 않는 장난감을 중고거래해 돈의 흐름을 직접 느껴보게 했다.
책을 쓰는 과정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하나의 창업 여정이었다. 부모들의 필요를 조사하고, 아이와 함께 여러 차례 놀이를 하며 어떤 활동에서 눈빛이 반짝이는지, 어떤 설명이 지루한지 기록했다. 출판사와 조율했고, 지인 부모들의 조언, 교사들의 의견, 내 아이의 솔직한 반응까지 모두가 책의 공동 개발자였다. 교정지를 고칠 때마다 완성도를 높였다.
마침내 『머니IQ가 쑥쑥 자라는 경제놀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와 경제놀이를 시작하며 대화가 달라졌다”, “어려운 개념을 이렇게 쉽게 풀 수 있다니 놀랍다”는 메시지는 내가 발견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책 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나는 ‘금융팔로미’라는 이름으로 SNS를 운영하며 더 많은 부모와 연결되었다. 경제교육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하면 친근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아이와 함께 찍은 영상이나 AI를 활용한 콘텐츠로 방법을 바꿔 나갔다.
실패도 많았다. 만든 콘텐츠가 외면받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반응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실패도 또 다른 배움”이라 되새기며 멈추지 않았다. 개선과 도전의 반복 속에서 나는 기업가정신의 본질을 체득했다.
지금은 단순히 조회수를 넘어 실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내 콘텐츠를 보고 아이와 용돈 기입장을 시작했다는 부모, 경제놀이 덕분에 소비를 스스로 고민하기 시작한 아이까지. 처음의 문제의식은 이제 많은 가정 속에서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 걸음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분명 기업가의 길과 닮아 있었다. 작은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성장했다. 내가 깨달은 기업가정신은 거대한 자본이나 화려한 성과가 아니다. 눈앞의 작은 문제를 붙잡는 예민함, 두려움보다 시도를 선택하는 용기,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더 이상 숫자만 들여다보는 연구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엄마로서, 작가로서, 크리에이터로서 매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작은 기업가다. 그리고 가장 큰 보람은 내 아이가 이제 “엄마, 이것도 경제야?”라며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의 불편을 내일의 기회로 바꾸려는 순간, 우리는 모두 이미 기업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두 문장의 이정표
나는 19살에 수능을 치르고 간호학과에 들어갔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에서는 안정적이고 의미 있는 길이라며 축하해 주었지만, 내 마음속엔 늘 의문이 있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길인지, 이 길이 내게 맞는 길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흔들림은 더 커졌다.
20살이었던 2017년 6월,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늘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살아오신 분이었기에, 병상에서 내게 건네신 한마디는 평생 잊히지 않는 울림이 되었다.
“남이 바라는 길이 아닌, 네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꿈을 선택하길 바란다.”
그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문제를 스스로 마주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며, 실패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버지의 말씀 속에는 기업가정신의 핵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간호학과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수험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주위의 만류와 두려움이 나를 흔들었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닿은 곳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그 무렵 나는 미국의 안과 의사이자 발명가인 ‘패트리샤 배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 의사로서 최초로 의학 특허를 취득했고, 1980년대에는 백내장 수술을 혁신적으로 바꾼 레이저 장비를 고안했다. 여러 제도적 어려움과 연구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연구를 계속 이어갔고, 그 기술은 수많은 환자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녀가 남긴 말, “Do not allow your mind to be imprisoned by majority thinking. Remember that the limits of science are not the limits of imagination.” 이 문장이 지금도 내 노트 맨 앞에 있다.
아버지의 말과 배스의 말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남이 정해준 길이 아닌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꿈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말. 그리고 세상이 불가능이라 말해도 스스로 길을 개척하라는 배스의 신념. 이 두 문장은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이정표가 되었다.
21살, 나는 결국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공부를 할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과 배스의 교훈이 나를 일으켜 주었다. 지금, 나는 외과 수의사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외과 수의사’라는 타이틀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인체 의료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3D 프린팅 기술을 수의학 실습과 수술에도 널리 적용하고 싶었다. 환축 맞춤형 임플란트나 수술 가이드를 설계하고, 직접 출력까지 해봤다. 출력물이 부러지고, 크기가 맞지 않아 수정과 재시도가 반복되는 날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다음 버전으로 가는 단단한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병원 현장에서도 작은 변화를 이어오고 있다. 수술실 내 가구 배치를 통해 멸균 흐름을 정리해 효율과 안전을 높였고, 보호자 안내 자료를 이해하기 쉽게 다시 썼다. 모두가 가볍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크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고, 개선과 창조로 이어가는 태도가 바로 나의 기업가정신이다.
돌아보면, 이런 기업가정신을 갖고 내 삶을 이끄는 건 단 두 줄의 문장 덕분이다. 나는 여전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수의사가 된 것은 목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다. 앞으로도 불편을 기회로, 실패를 데이터로 바꾸어 더 나은 수의사가 될 것이다.
기업가정신, 에듀프러너로 함께 성장하는 시간
상업고등학교 발령 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업가정신, 창업교육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내게 상업계 특성화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상고에서 주요교과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무력감에 젖어있을 때 전환점이 찾아왔다. 창업경진대회 준비 과정에서 들은 한 학생의 하소연이었다. “선생님, 이거 뭐 하고싶은 건 있는데 대체 어떻게 글로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아이들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 취업과 창업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들, 사업제안서나 아이디어 제안서를 쓸 때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 설득력있는 말하기를 하고싶지만 말하기 상황이 두려운 아이들, 진로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아 고민하는 아이들, 무력감에 잠겨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교과수업 안에서 창업 제안서, 자기소개서 작성을 위한 작문 수업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조화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수소문 끝에 창업, 기업가정신과 관련된 다양한 강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기업가정신 K-MOOC 강의에 등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매일 퇴근해서 조금씩 온라인 강의를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론적 기반이 부족하다고 느껴 한국경제와 K학술확산연구센터에서 제공하는 ‘한국의 기업가와 기업가정신’ 프로그램도 신청했다. 아산나눔재단의 기업가정신 교육 관련 영상자료, 한국청년기업가정신나눔재단의 영상자료와 IMP 기반 사회적 가치측정같은 이론들을 습득했다.
단순히 이론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이를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해답을 독서와 글쓰기 교육에서 찾았다. 책을 통해 다양한 기업가들의 경험과 철학을 접하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독서모임을 구축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책 읽을 시간에 자격증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NCS 자기소개서 작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서와 기업가정신의 중요성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한국은행 자기소개서 문항에도 학업수행 경험 있고, 한국무역보험공사에도 사무직 직무에 가장 필요한 역량에 대한 질문이 있는거 보이죠?”라며 조금씩 독서와 도전의 문턱을 낮춰갔다. 그러자 학생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기업가정신이 창업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취업 후에도 조직에서 혁신을 이끌어가는 핵심 역량임을 강조했다. 직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자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야말로 모든 직업인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그 기업가정신은 지금 스스로가 있는 장소에서 먼저 실천해야한다는 것도. 이것도 NCS 기반 자기소개서 문항에 뭐가 있는지 취업부 선생님께 찾아가서 여쭤보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학생에게 가장 어려운 게 뭔지 물어봐가며 얻은 방법이었다.
학생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안주하고 있다면 설득력이 없을 터였다. 그래서 관광지에서 열린 기타 수익 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직접 참여했다. 시장 및 수요 근거를 제시하고, 비용 대 수익 시나리오 분석, 민감도 포인트를 바탕으로 드론 촬영 서비스 솔루션 아이디어로 1등상을 받았다. 기존 사업과의 매칭 포인트를 강조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듯했다. 상을 받았을 때의 기쁨도 컸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선생님도 우리랑 똑같이 하시는구나!”라며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연수에서 배웠던 교육과 앙트레프러너를 결합한 용어인 에듀프러너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 느꼈다. 기업가들만이 기업가정신을 가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들도 아주 작은 실천을 함께 반복해야 아이들도 앙트레프러너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더 큰 프로젝트에 도전하게 되었다. 전남 지역에서 유망한 프로젝트에 지원해주는 사업이 있는데, 여기에 학생들과 함께 지원해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의 자료들을 참고하였는데, 그 중 웹드라마에서 다룬 지역 사업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대학 창업 운영 가이드’의 내용이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지역혁신 주체로서의 교육기관 역할에 대한 부분과, 교육기관이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 혁신 창업인재’ 양성 기지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우리 지역 소재 기반 관광 사업 제안서를 써보기로 했다. 지역가치 창출과 지역사회 변화를 위해 활동하는 로컬 체인지메이커(Local Changemaker)와 달리 지역의 자원과 문화적 특성을 기반으로 지역의 가치를 재창출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나주배, 곰탕과 같은 미식과 역사 문화 자산을 바탕으로 체류형, 경험형 관광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관광상품과 관광코스를 개발하겠다는 제안이 인정받아 600만원의 상품 개발 지원금을 받은 것이다. 학생들은 “우리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고, 나 역시 교육자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단순히 기존 교육과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진짜 도전은 그 다음이었다. KDB(산업은행) Develop Youth Camp 참가 공고를 보고 학생들에게 제안했을 때, 1학년 학생들이 “우리가 벌써 창업캠프 같은 거 가도 되나?”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 자신들이 전국 단위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결하게 말했다. “실패해도 되니까 그냥 해봅시다.”
기업가정신의 핵심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완벽한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보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시작해보는 것.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만든 나주 프로젝트 사례를 들었다. “이미 600만원짜리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거 벌써 잊었나요? 실패하면 다른 거 또 하면 그만입니다.” 점차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업은행 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이 주관한 KDB Develop Youth Camp에 참여한 결과는 기대를 뛰어넘었다. 1명이 대상을, 3명이 최우수상을, 1명이 소셜 임팩트상을 수상했다.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히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발표한 학생들의 모습은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 학생들의 얼굴에 피어난 자부심과 성취감은 교사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었다. 아이들이 상을 받아온 것보다 더 기쁜 게 있었다. 지역의 상업고등학교라는 것때문에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아이들이 향상심에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 가보니까 이미 다른 애들은 자격증 수십개를 땄더라구요.”, “저도 쫌만 했으면 대상이었는데, 다음엔 안봐줘요.” 하면서 아이들끼리 자격증 스터디를 만들고, 창업 상품 아이템 조사 스터디를 만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기업가정신이라는 개념도 생소했고, 창업교육 방법론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겪으며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잘 모르더라도 일단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업가정신이 아닐까 싶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한 다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한 발씩 나아가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지금까지의 시도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진 않았다. 최근에, 아이들은 전국 상업 경진대회에 출전해서 모두 실패했다. 나 역시 다른 사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출품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이들은 다음 대회를 준비하기로 했고, 나 역시 실패 요인을 분석하고 페르소나 설정과 함께 실현 시나리오를 추가로 작성하며 다른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꾸준히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에듀프레너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기업가정신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생각하는 명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실패하지 않으면 충분히 도전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실패를 쌓아가며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겠다.
공감에서 태어난 혁신, 도전에서 이어진 가치 - 언더센셜에서 찾은 기업가정신의 여정
어릴 적부터 발달장애가 있는 여동생을 곁에서 보며 자랐다. 여동생은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그림과 몸짓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무관심이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이 나의 기업가정신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 ‘언더센셜(Undersential)’을 창업했다. 이 이름은 사회에서 종종 ‘덜 중요하다(Under)’고 치부되는 존재들이 사실은 누구보다 ‘본질적(Essential)’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세상과 연결하는 것, 그것이 언더센셜의 시작이었다.
첫 시도는 발달장애 아동들의 그림을 활용한 티셔츠 제작이었다.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과 목소리를 세상과 잇는 창이었다. 우리는 수십 건의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통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았고,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원단을 찾고, 초기 자금은 직접 셀프 펀딩으로 충당했다. 제작 과정에서는 단가와 품질 문제로 수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소비자 인터뷰와 부모 모임을 거듭하며 제품을 개선했다. 결국 티셔츠는 공감을 얻었고, 판매 수익은 전액 복지기관에 기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값진 성과는 사회적 파급력이었다. 아이들의 그림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꿈과 미래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소비자들은 티셔츠를 입으며 단순한 ‘그림’이 아닌 ‘목소리’를 들었고, 이는 장애 인식 개선으로 이어졌다. 부모님들은 자녀의 그림이 사회적 가치를 전하는 순간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고,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가 존중받는 경험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했다. 우리는 한 장의 그림이 개인을 세우고 사회의 인식을 바꾸며 공동체의 가치를 확장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다음 단계는 장애인 맞춤 의류 개발이었다. 여동생이 옷을 갈아입는 데 겪는 불편에서 출발해, 지퍼를 넓고 길게 조정하고 팔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옆선을 설계했으며, 디자인은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단순한 옷이 아니라 존엄을 지켜주는 옷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복잡한 제작 과정과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샘플을 입은 여동생의 환한 웃음은 모든 노고를 보상해 주었다. 이 경험은 사회적 약자의 불편을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혁신적인 출발점임을 보여주었다.
이후 언더센셜은 사회로 확장되었다. 기업 사회공헌 행사에서 우리의 옷이 사용되었고, 이를 계기로 장애인 단체에 기부가 이어졌다. 미국 단체와 협력해 지사를 설립하고, 홍천의 통합 돌봄센터와 교육 소외지역에서 교육 봉사 동아리를 운영하며 아이들과 함께했다. 작은 시작이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기업가정신의 힘을 체감했다.
또한 다문화 가정과 소외계층의 메시지를 담은 리유저블 컵 제작 활동도 진행했다. 단순한 굿즈가 아니라, 차별을 넘어서는 메시지와 환경적 가치를 동시에 담은 매개체였다. 판매 수익은 푸른나무재단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되며 다시 공동체로 환원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문제 해결과 환경적 가치 창출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리더십’과 ‘협력’의 의미를 배웠다. 끝없는 토론과 역할 분담, 갈등 조율 속에서 우리는 더 창의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열정이 기업가정신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언더센셜은 이제 단순한 청소년 창업이 아니다. 옷과 컵을 통해 일상이 곧 교육이 되고,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이 경험을 토대로 더 큰 무대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혁신을 만들어가고 싶다. 기업가정신은 단순한 경제적 성공이 아니다. 누군가의 불편을 해결하고, 작은 목소리를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언더센셜을 통해 배운 진정한 기업가정신이다.
무료에서 시작된 첫 수익
나는 기업가정신이 꼭 거창한 창업이나 대규모 투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행동에서 시작해 주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기업가정신이라고 믿는다. 내 경험은 우리 학교 옆 카레 음식점에서 시작되었다.
그 가게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의 음식점이었다. 사장님은 손님들에게 늘 밝게 인사하고, 특유의 입담과 유머로 단골을 붙잡는 분이었다. 나도 가끔 했던 사장님과의 스몰토크가 정말 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곳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웹 개발을 배우는 난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음식점은 웹사이트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서 사장님께 여쭤봤다. “혹시 여기 웹사이트도 있나요?” 사장님은 SNS만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웹사이트를 만들어드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디자인과 개발 모두 관심이 많던 나는 혼자서도 웹사이트를 완성도 높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리니 웹사이트의 완성도를 훨씬 높여줄 로고, 음식점의 분위기들을 담은 많은 소스들을 주셨다. 완성된 웹사이트는 이 음식점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으며,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원래 있었던 웹사이트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다시 그 카레 음식점에 방문해서 보여드렸다. 기대했던 만큼 사장님은 너무나 좋아하셨고 고마워 하셨다. 누군가를 위해서 웹사이트를 만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사장님도 만족하신 것 같아서 너무 뿌듯하고 행복했다. 사장님이 부담스러우실까봐 내 포트폴리오가 늘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웹사이트가 공개되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사장님은 SNS에 “이 웹사이트 우리 가게 학생이 만들어 준 거예요”라고 자랑처럼 올리셨고, 그 소식은 웹사이트가 필요한데 고민하시던 분들께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낯선 번호로 연락을 받았다. “저도 웹사이트가 필요한데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라는 요청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무료로 시작했던 일이 새로운 기회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웹사이트 제작을 통해 학생에게 많다고 생각될 정도의 대가를 받았다. 단순히 돈을 벌었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가진 기술이 누군가에게 실제 도움이 되고, 그것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작은 선의의 행동이 결국 나 자신에게도 배움과 성장을 주었고, 동시에 지역 사회 안에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낸 셈이었다. 무엇보다 “가치가 먼저, 보상은 나중”이라는 순서를 몸으로 이해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기업가정신이 단순히 ‘내가 성공하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고민하며, 실행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기업가정신의 실천이었다. 더 나아가, 그 결과는 나 혼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다.
나는 이 경험이 사회적 가치로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작은 웹사이트 하나는 단순한 페이지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음식점 사장님에게는 손님과 연결되는 다리가 되었고, 또 다른 분들에게는 “디지털 전환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가진 기술을 나누는 일이 누군가의 하루를 편리하게 만들고, 결국은 지역 상권에도 작지만 분명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더 많은 도전을 할 것이다. 어떤 일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만든 결과물이 모두에게 환영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카레 음식점의 사장님과 나눈 그 작은 인연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시도할 용기를 얻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 기술과 시간을 기꺼이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당장의 수입으로 이어지든 아니든, 그 과정에서 분명 새로운 배움과 연결이 생긴다. 작은 선의가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가 다시 나에게 도전할 힘을 준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기업가정신이며, 앞으로도 지켜가고 싶은 삶의 태도다.
찢어진 신발이 물었고, 기업가정신이 답했다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로 향하던 길이었다.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던 그 순간, 갑자기 ‘뚜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신발 밑창이 찢어져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 친구들이 소리를 듣지 않을까 발을 끌며 교문으로 향했다. ‘새 신발을 사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브랜드는 나이키, 아디다스뿐이었다. 문득 내 발에 찍힌 로고가 시선을 붙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 발에도 모두 외국 브랜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의문이 생겼다. ‘왜 우리나라 신발을 신는 사람은 보이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브랜드가 없는 걸까?’
집에 돌아와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FILA Korea’, ‘르까프’ 등 국산 브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 시장 점유율을 확인하는 순간 또 한 번 놀랐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두 회사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기업들의 점유율은 고작 몇 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더 찾아보니, 해외 기업들은 끊임없는 기술 개발과 과감한 마케팅,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 비전, 즉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반면,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안정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으니 됐다’며 노트북을 덮고 일상을 이어갔다.
며칠 후, 아버지와 함께 뉴스를 보던 중 또 다른 충격이 다가왔다. 반도체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의 TSMC가 세계 시장 점유율을 더욱 확대하며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렸다는 보도였다. “삼성이 이렇게 밀리다니…” 믿기 어려웠다. 삼성은 대한민국의 상징 같은 기업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더 알아보니 이번에도 결국 ‘기업가정신’의 차이가 주요 원인이었다. 기술력과 자본은 충분했지만, 더 과감한 도전과 혁신적 시도에서는 부족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신발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 전체가 기업가정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생각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업은 운이 좋아야 하는 거야”, “넌 그냥 공부나 해”였다. 순간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괜한 고민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곱씹어 보니, 안정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실패하면 낙인이 찍히고,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현실. 반면 미국은 실리콘밸리처럼 실패를 하나의 자산으로 인정하며, 민간 투자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과감히 자금을 지원한다고 했다. 그런 환경에서야 혁신적인 기업가정신이 꽃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찢어진 신발’이라는 사소한 계기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고 있었다. 기업가정신은 특정 기업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나 같은 개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태도였다. 안정된 길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문제라도 스스로 해결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로운 도전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운 기업가정신의 본질이었다.
앞으로 나는 공부와 일상 속에서 작은 아이디어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메모하며, 직접 시도해 볼 것이다. 그것이 비록 사소한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배우는 용기와 깨달음은 나만의 자산이 될 것이다. 언젠가 내 이름을 건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자체가 기업가정신이라고 믿는다.
찢어진 신발은 내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도전의 출발선이었다. 그것은 “안정 속에 머물 것인가, 새로운 길을 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이제 그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업가정신은 나에게 단순한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이끄는 나침반이자 불빛이 되었다. 실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가겠다는 이 다짐이, 언젠가는 나만의 발자취를 세상에 남기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창업과 기업가정신
기업가정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성실함, 끈기, 지도력 등 흔한 단어만 생각났고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진행된 모의 창업 수업을 통해 그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학교에 외부 강사 선생님이 오셔서 창업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습니다. 반 친구끼리 조를 이루어 모의 창업을 했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막하기만 했는데 선생님께서 경험을 주제로 해보라고 하셔서 저희 조는 올해 3월 경북 지역에선 난 산불을 학교 근처 산에서 불이 나는 것을 보았는데 연기로 인해 10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고, 폰에서는 안전안내문자가 계속 오는 게 무서웠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연기 때문에, 집에 가는 친구들도 많아 반은 텅텅 비었었는데 이렇게 무서운 불이 코 앞에서 나타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사람들이 화재를 보면 당황해서 소화기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다가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에서 투척용 소화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투척용 소화기는 기존 소화기보다 가벼워 노인과 어린이도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작은 크기로 어떤 곳이든 비치할 수 있어 화재가 발생했을 때 초기 대응이 가능합니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사용하여 업사이클링으로 친환경적이며, 던지고 도망갈 수 있어 안전하고 신속해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발표하고 나니 의외로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평가에서도 다른 조를 이기고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었지만, 이런 사소한 경험이 창업 아이템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렵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이번 경험으로 저는 기업가정신이 기업가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닌, 우리가 모두 삶에서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업가정신은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도전하며,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아이디어가 누군가의 안전을 지킬 수 있고 사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모의 창업 활동 과정 중에서 협력의 중요성도 배웠습니다. 이 활동을 혼자서 했더라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을 테지만 친구들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점을 찾고 해결 방법을 간구해 보니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활동으로 인해 ‘창업해야겠다.’라는 생각보다, 기업가정신이 어떤 꿈이든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저는 단순히 노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기회가 오더라도 도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자격증 공부를 할 때도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농업직 공무원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종자기능사, 유기농업 기능사 등의 자격증 공부를 하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업가정신을 배우면서 저는 이 꿈도 단순히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이 기업가정신 콘텐츠 공모전은 단순히 글을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배운 경험을 돌아보며 저의 성장 과정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업가정신에 대해서 처음 들어봤는데 말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작은 경험 속에서도 충분히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번 공모전을 통해서 아이디어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사회에 꼭 필요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싶습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창업은 거창한 기술이나 거대한 자본이 아니라, 작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공모전은 저에게 있어서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기업가정신을 배움으로써 저는 두려움보다는 도전을 선택하고, 문제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제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